처음 유럽을 여행했을 때, 에어컨이 없는 호텔에 들어 가서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늘에만 들어가면 언제 더웠냐 싶을 만큼 금방 시원해지는 게 유럽 날씨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엔 그 유럽에서 여름마다 수만 명이 열사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에어컨 보급률이 여전히 20%를 밑도는 유럽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알아보겠습니다.

유럽에 에어컨이 없는 이유 — 날씨, 건축, 규제의 삼중 벽
제가 처음 유럽을 방문했을 때 가장 신기했던 건 엘리베이터 없는 호텔이었지, 에어컨 유무는 솔직히 신경도 안 썼습니다. 습도가 낮으니 그늘 하나로 충분했었습니다. 파리의 7월 평균 최고기온이 25도에 불과하다는 걸 나중에 알고 나서야 '아, 그래서 그렇구나' 싶었습니다. 유럽에서 에어컨이 찬밥 신세가 된 건 단순히 날씨 탓만은 아닙니다. 역사적·건축적·행정적 요인이 켜켜이 쌓인 결과입니다.
먼저 건축 구조 문제입니다. 유럽 주택의 절반 이상이 1970년대 이전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두꺼운 석조 벽과 높은 천장은 겨울 추위를 버티기 위한 설계였지만, 새벽 찬 공기를 가둬두는 방식으로 여름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어느 정도'가 2003년 폭염 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는 점입니다. 달궈진 돌벽이 오히려 열을 가둬버리면서, 프랑스 한 나라에서만 약 15,000명이 사망했습니다. 파리 인근 냉동 창고에 시신을 안치해야 했던 그 참혹한 상황은, 유럽의 전통적 더위 대처 방식이 기후 변화 앞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행정 규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유럽에서 임차인이 에어컨을 설치하려면 건물주 동의를 받고, 관청 허가까지 받아야 합니다. 이 행정 절차가 보통 6개월 이상 걸립니다. 여름이 다 지나간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오메가 블로킹(Omega Blocking) 현상 — 북아프리카 사막의 뜨거운 공기가 유럽 상공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하는 기상 패턴 — 이 길게는 2주 이상 지속되는데, 허가 기다리다 그 여름을 통째로 날리는 셈입니다.
프랑스는 난방기구에 부가세 5%를 매기는 반면 냉방기구에는 20%를 부과합니다. 유럽 전기 요금 자체도 한국의 3~4배 수준입니다. 청정 에너지 전환 정책으로 발전 단가가 높아진 결과입니다. 여기에 유럽의 오래된 건물 배관과 전력 시스템이 에어컨 전력 소비량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건물 전체 전기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하는 상황도 생깁니다. 이탈리아 포르토피노처럼 경관 보호 지구로 지정된 곳에서는 실외기 설치 자체가 불법이고, 적발 시 벌금이 8,000만 원에 달하기도 합니다.
독일어권에는 '추크루프트(Zugluf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바람이 건강에 해롭다는 믿음으로, 에어컨이나 선풍기 바람을 꺼리는 문화적 배경이 됩니다. 실제로 독일 에어컨 보급률은 3%, 영국은 5%에 불과합니다(출처: IEA, The Future of Cooling). 환경 의식도 강하게 작용합니다. 프랑스 국립 기상 연구센터 연구에 따르면, 파리에서 에어컨 사용량이 2배 늘면 도심 온도가 2도 이상 오른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유럽인들이 에어컨을 단순한 가전이 아니라 지구를 오염시키는 기기로 인식하는 배경입니다.
- 에어컨 보급률: 한국 98%, 미국 90%, 이탈리아 약 7~56%(자료마다 차이), 프랑스·영국 5%, 독일 3%
- 2003년 유럽 폭염 사망자: 약 70,000명 / 최근 집계 기준 연간 60,000명 이상
- 프랑스 에어컨 부가세: 냉방 20% vs 난방 5%
- 유럽 전기 요금: 한국 대비 3~4배 수준
- 행정 허가 소요 기간: 평균 6개월 이상
온열질환 사망자가 늘어도 왜 바뀌지 않나 — 그리고 바뀌기 시작한 것들
제 경험상, 유럽 여행 중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은 남부 이탈리아 한낮이었습니다. 습도가 높지 않은데도 햇볕이 워낙 강해 모자와 선글라스 없이는 눈을 뜨기 힘들었습니다. 그늘만 있으면 시원하던 북부 유럽과 달리, 남유럽 여름은 체감 자체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런던이나 베를린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온열질환(Heat-related Illness)이란 고온 환경에 장시간 노출될 때 체온 조절 기능이 무너지며 발생하는 질환군을 말합니다. 열경련·열탈진·열사병으로 단계적으로 악화되며, 열사병 단계에서는 사망률이 급격히 높아집니다. 2022년 유럽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 사망자는 62,000명 이상으로 집계됐으며, 2023년 7월 초에만 이미 3,500명을 넘었습니다(출처: 유럽질병예방통제센터(ECDC)). 독일 베를린은 최고기온 평균이 파리보다 낮은 도시인데, 2019년 여름 38도를 기록했습니다. 영국 기상청은 런던이 40도 이상을 경험할 가능성이 10배 이상 높아졌다고 경고합니다.
이 상황에서 에어리즘(Airism)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본래 일본 유니클로의 기능성 소재 브랜드명이지만, 최근에는 더위 대응 쿨링 기술 전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확장되어 쓰이기도 합니다. 기업들은 냉감 소재, 쿨링 스프레이, 휴대용 선풍기 등 쿨 제품을 앞다투어 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열질환 앞에서 이런 제품들은 임시방편에 가깝습니다.
유럽 내에서도 변화는 시작됐습니다. 프랑스 마트에서 에어컨 3만 대가 평소보다 4배 빠른 속도로 팔렸고, 이동형 에어컨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이동형 에어컨의 경우 실외기가 필요 없어 행정 허가 절차를 건너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중국산 이동형 에어컨이 유럽 시장에서 판매량을 빠르게 늘리고 있는 것도 이 맥락입니다. 다만 성능과 마진 문제로 시장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건 한국 기업의 가능성입니다. 삼성, LG 같은 기업이 유럽 오래된 건물의 외관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냉난방을 동시에 해결하는 히트펌프(Heat Pump) — 전기 에너지를 이용해 외부 열을 실내로 끌어들이거나 내보내는 방식으로 냉난방 모두 가능한 장치 — 형태의 제품을 유럽 시장에 맞게 개발한다면, 충분히 새로운 한류 붐을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히트펌프 보급은 탄소 감축 목표와도 맞닿아 있어, 정치권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분위기입니다. 에어컨 설치가 사실상 불법이던 지역에서도 히트펌프 방식은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유럽 여행 갈 때 에어컨 있는 숙소를 어떻게 찾나요?
A. 숙소 예약 시 필터에서 'Air conditioning' 항목을 반드시 체크하시길 권합니다. 제 경험상 파리나 런던 같은 도시의 구도심 호텔들은 에어컨 없는 곳이 꽤 많습니다. 특히 6~8월 여행이라면 가격이 조금 높더라도 에어컨 여부를 먼저 확인하는 게 낫습니다.
Q. 유럽 폭염 사망자가 그렇게 많은 이유가 뭔가요?
A. 에어컨 보급률이 낮은 데다, 고령 인구 비중이 높고, 바캉스 시즌과 겹쳐 의료 인력도 부족한 구조가 맞물립니다. 2003년 폭염 당시 프랑스에서만 15,000명이 사망했는데, 바캉스 철이라 시신을 인수할 가족조차 없어 냉동 창고에 안치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온열질환은 초기 대응을 놓치면 급격히 악화되기 때문에, 냉방이 전혀 없는 환경에서 고령자는 특히 취약합니다.
Q. 유럽에서 에어컨 설치 비용이 왜 1,000만 원씩이나 하나요?
A. 두꺼운 석조 벽에 배관을 뚫는 공사 자체가 큰 작업이고, 유럽에서 에어컨 설치는 마이스터(Meister) 수준의 자격을 가진 기술자만 할 수 있어 인건비가 시간당 100~150유로에 달합니다. 거기에 19~20%의 부가세까지 붙으니, 문화재 건물이나 오래된 공동주택 기준으로는 설치비만 1,000만 원 이상이 나오는 경우가 생깁니다.
Q. 이동형 에어컨이 유럽에서 대안이 될 수 있나요?
A. 실외기 설치 규제와 행정 허가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선택지입니다. 다만 고정형 에어컨에 비해 냉방 효율이 낮고, 오래된 건물의 전력 시스템이 버텨줘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폭염이 반복된다면 보급이 더 빠르게 늘 것으로 보이지만, 근본 해결책이라기보다는 과도기적 대안에 가깝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결론
유럽의 에어컨 문제는 단순한 가전 보급의 문제가 아닙니다. 수백 년 된 건물 구조, 복잡한 행정 규제, 뿌리 깊은 환경 의식, 그리고 기후 변화라는 거대한 흐름이 한꺼번에 충돌하고 있는 현장입니다. 제가 처음 유럽을 여행했을 때만 해도 그 여름이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 느꼈던 '그늘만 있으면 시원한 유럽'은 이제 옛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가 계속되는 한, 유럽의 여름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에어컨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선택하면 되지만, 선택조차 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분명히 달라져야 할 부분입니다. 히트펌프를 포함한 냉난방 기술이 유럽의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하며 자리를 잡는다면, 그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뜻밖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쩌면 진짜 의미 있는 한류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