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고층 빌딩 7,212개 중 유럽에는 단 281개밖에 없습니다. 한국보다도 적은 수치입니다. 세계 GDP의 2배 이상을 차지하는 경제 대국들이 모여 있는 대륙치고는 너무 낮은 숫자라 처음 이 데이터를 접했을 때 저도 잠시 멈칫했습니다. 유럽 여행 중 대성당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도시들이 왜 그토록 균형 잡혀 보였는지, 이제야 숫자로 이해가 됩니다.

고층 빌딩이 없는 이유: 역사적 배경
고층 빌딩(skyscraper)이란 일반적으로 높이 150m 이상, 40~50층 규모의 건물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스카이스크래퍼란 말 그대로 "하늘을 긁는 건물"이라는 뜻으로, 19세기말 미국 시카고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입니다. 당시 시카고는 철도 교통의 허브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수직으로 올라가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없던 건축 양식이 도시의 필요에 의해 탄생한 셈입니다.
유럽은 출발점 자체가 달랐습니다. 그리스 폴리스(polis) 시대부터 도시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와 아고라(agora)를 중심으로 수평적으로 확장되어 왔습니다. 아크로폴리스란 도시 국가의 신전과 방어 시설이 모인 고지대 중심부를 뜻하고, 아고라는 시민들이 모여 교역하고 토론하던 광장을 의미합니다. 이 구조가 수백 년에 걸쳐 굳어지면서 유럽의 도시는 이미 복잡한 역사적 레이어(layer)를 쌓아올렸고, 그 위에 수직으로 뭔가를 얹는다는 발상 자체가 문화적으로 낯선 것이었습니다.
500년 이상 된 건축물이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유럽에서 고층 빌딩은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기 드 모파상이 에펠탑 레스토랑을 즐겨 찾은 이유로 알려진 일화가 있습니다. "파리에서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장소"라서 거기서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인데, 저는 이게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유럽인들이 도시 경관을 얼마나 진지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도시를 다시 지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들을 새로 설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럽이 선택한 방향은 고층화가 아니라 복원(restoration)이었습니다. 여기서 복원이란 단순히 건물을 다시 짓는 것이 아니라, 파괴된 정체성을 되살리는 문화적·심리적 치유 과정을 의미합니다. 폭격으로 무너진 성당과 광장을 원형에 가깝게 재건하는 데 자원을 쏟아부은 것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경제적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파리와 피렌체, 그리고 빈을 돌아봤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 도시들이 서로 다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고유한 스카이라인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 이건 이탈리아 답다"는 느낌이 저절로 드는 건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수백 년의 도시 문법이 지켜온 결과였던 겁니다.
- 고층 빌딩의 탄생지는 19세기 미국 시카고 — 유럽과는 도시 발전 경로 자체가 다름
- 그리스 폴리스 이래 유럽 도시는 수평 확장 중심으로 진화해 옴
- 2차 세계대전 이후 고층화 대신 역사 건축물 복원을 선택한 유럽
- 전 세계 고층 빌딩(150m 이상) 7,212개 중 유럽은 281개, 전체의 3% 미만(출처: Council on Tall Buildings and Urban Habitat)
지금도 계속되는 건축 규정과 도시 계획의 방향
유럽의 고층 빌딩 억제는 과거의 유산에만 기댄 것이 아닙니다. 현재도 도시별로 엄격한 높이 제한(height restriction) 규정이 살아있습니다. 여기서 높이 제한이란 도시 경관과 역사 지구 보호를 위해 신축 건물의 최대 높이를 법으로 못 박아둔 제도를 말합니다. 뮌헨은 성모 마리아 교회 첨탑인 99m를 도시 전체의 사실상 최고 높이 기준으로 삼고 있고, 파리는 도심 내 37m 제한이 적용되어 에펠탑 외의 고층 건물을 도심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런던 역시 세인트 폴 대성당의 조망권을 보호하는 뷰 코리더(view corridor) 규정을 두어 특정 방향에서 찍히는 스카이라인을 법적으로 관리합니다.
브뤼셀은 이 규정이 오히려 반작용을 낳은 도시로 꼽힙니다. 1960~70년대에 무분별하게 역사 지구를 철거하고 현대식 건물을 세웠다가 혹독한 비판을 받은 이후, 유럽에서 가장 엄격한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 보호 규정을 도입한 것입니다. 이 경험은 다른 유럽 도시들이 제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고층 빌딩 자체가 나쁜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저는 그렇게 단순하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우리나라 상황을 돌아보게 됩니다. 일본은 인구가 꾸준히 줄고 있음에도 빈집이 900만 채에 달하고, 우리나라 역시 전국 빈집이 약 160만 채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습니다(출처: 일본 국토교통성). 인구는 감소하는데 고층 건물은 계속 올라가는 이 아이러니를 유럽식 도시 계획의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이 보입니다.
도시화(urbanization)란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며 도시가 팽창하는 현상을 뜻합니다. 이 흐름이 무조건 고층화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는 것을 유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유럽에서도 변화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나 런던의 카나리 워프 같은 지역은 비즈니스 디스트릭트(business district) 형태로 고층 빌딩을 허용하되, 역사 지구와 공간적으로 분리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주거와 업무를 완전히 수직으로 쌓는 것과, 역사 도심은 그대로 두고 신개발 지역에만 고층화를 허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도시 철학입니다.
제가 유럽 도시들을 돌아보면서 계속 마음에 걸렸던 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대성당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통일된 지붕선, 어느 골목을 꺾어도 끊기지 않는 도시의 결. 저는 그것이 단순히 오래된 건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축적된 도시 계획 철학(urban planning philosophy)이 지금도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 후손들이 그런 도시를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까,라는 질문은 여행 내내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유럽에 고층 빌딩이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뭔가요?
A. 단 하나의 이유라기보다는 복합적 원인이 맞물린 결과입니다. 그리스 폴리스 시대부터 수평 확장으로 발전해온 도시 구조, 2차 세계대전 이후 역사 건축물 복원을 선택한 문화적 결정,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엄격한 높이 제한 규정이 함께 작동하고 있습니다. 미국처럼 급격한 인구 집중이나 공간 부족을 겪지 않았던 역사적 배경도 중요한 변수입니다.
Q. 파리에는 왜 고층 빌딩이 없는 건가요?
A. 파리 도심에는 37m 높이 제한이 적용됩니다. 1970년대에 몽파르나스 타워가 지어진 후 도시 경관이 훼손됐다는 거센 비판이 이어졌고, 이후 파리 시는 도심 고층화를 사실상 금지했습니다. 고층 건물은 도심 외곽의 라 데팡스(La Défense) 비즈니스 지구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 방식이 역사 경관과 현대 업무 공간을 분리하는 파리식 해법입니다.
Q. 유럽보다 한국에 고층 빌딩이 더 많다는 게 사실인가요?
A. 네, 사실입니다. Council on Tall Buildings and Urban Habitat의 데이터를 기준으로 하면 전 세계 고층 빌딩(150m 이상) 중 유럽 전체가 차지하는 비율은 3% 미만인 281개로, 한국의 고층 빌딩 수보다 적습니다. 세계 GDP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대륙임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낮은 수치입니다.
Q. 유럽도 앞으로 고층 빌딩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나요?
A. 가능성은 있습니다.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주거 수요가 늘고, 기후 효율성 측면에서 수직 개발이 유리하다는 논의가 유럽 내에서도 커지고 있습니다. 다만 프랑크푸르트나 런던 카나리 워프처럼 역사 지구와 분리된 지정 구역 안에서만 고층화를 허용하는 방식이 우세할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 경관 자체를 허무는 방향으로 가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Q.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도시 계획을 바꿀 수 있을까요?
A. 당장의 전환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전국에 160만 채의 빈집이 생길 정도로 도시 집중과 인구 감소가 동시에 진행 중입니다. 다만 지금이라도 신규 개발에서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우선 기준으로 삼는 도시 계획 철학을 도입한다면, 수십 년 뒤에는 다른 도시 풍경을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유럽도 지금의 모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론
유럽에 고층 빌딩이 없는 것은 기술이나 자본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 선택이 수천 년에 걸쳐 쌓이고 제도로 굳어진 결과가 지금 우리가 여행지에서 감탄하는 풍경입니다. 제가 "스위스는 역시 스위스다"라는 말을 무심코 내뱉을 수 있는 건, 그 나라가 자신들의 도시 문법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구가 줄고 빈집이 늘어가는 지금, 우리나라도 고층화 경쟁에서 한 발 물러서서 주변과의 조화를 먼저 묻는 도시 계획을 고민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전통을 살리고 이어나가려는 노력이 미래를 여는 도시보다 앞서 있다는 것, 유럽이 오랜 시간을 두고 증명해온 사실입니다.